"27년 전 구매한 편도 항공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다"
여름휴가에 충동적으로 구입한 편도 항공권 한 장이 제이슨 리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97년 여름휴가 때 미국행을 결심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모하리만치 패기 넘치게 떠난 여행이었는데, 그게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LG백화점 디자인팀 창립 멤버였던 그는 한국 경제가 IMF 외환위기로 휘청이던 그때, 역발상으로 미국행을 선택했습니다. 그 무모한 결정이 그를 FBI와 CIA의 최고 보안 시설 설계자로, 세계 10대 병원 디자인 책임자로, 그리고 자신만의 기업 JLP인터내셔널을 이끄는 창업가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9/11 테러 이후,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서 단련된 그의 신속한 업무처리 능력은 미국 정부의 긴급한 보안 강화 요구와 완벽히 맞아떨어졌습니다.
"매 미팅마다 권총을 소지하고 창가를 피해 앉았던 의뢰인들... 이곳은 CIA, FBI, NSA, 백악관이 테러 대응을 위해 정보를 공유하는 핵심 시설이었습니다."
무모해 보였던 한 청년의 도전이 어떻게 글로벌 디자인 전문가의 여정으로 발전했는지, 그 과정에서 마주한 도전과 성공의 순간들을 이번 인터뷰에서 들어봅니다.
국내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셨는데 어떻게 미국에 갈 생각을 하셨나요?
1995년 LG백화점이 설립될 당시 디자인팀의 창립 멤버로 합류했습니다. 건축과 인테리어 분야를 맡아 98년 초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약 3년간 첫 프로젝트를 진행했죠.
당시 프로젝트를 하면서 늘 고민이 있었습니다. 해외 디자인을 한국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충돌과 이해의 차이를 자주 겪었거든요. 그래서 언젠가는 직접 외국에 가서 그 간극의 이유를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대기업의 조직문화였어요. 저는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성격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어리고 혈기왕성했던 탓에 조직에 잘 융화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97년 여름휴가 때 충동적으로 미국행을 결심했어요. LA로 날아가 서부횡단을 해보자는 단순한 생각으로요.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모하리만치 패기 넘치게 떠난 여행이었는데, 그게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로 미국으로 가시게 된 건가요?
첫 미국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퇴사 의사를 전달했을 때, 회사가 적잖이 동요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임원께서 개인적인 면담을 제안하셨고, 이는 제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조직 문화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을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고, 냉철한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현재 맡은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1년간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셨습니다. 저를 잘 이해하고 계신 분의 말씀이었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됐죠.
그렇게 회사에 남아있는 동안 차근차근 유학준비를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많은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올 때, 저는 오히려 1998년 초에 미국행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당시로서는 다소 모험적인 결정으로 보였을 수 있으나, 이 역발상의 선택이 후에 제 경력에서 특별한 경쟁력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첫 취업 과정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특히 IMF 이후 진출하신 만큼 여러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IMF가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이나 그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저는, 그저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에 가능했던 무모한 도전이었죠.
대학원 졸업 후 첫 취업을 위한 도전은 약 1년에 걸친 긴 여정이었습니다. 때마침 닷컴 버블이 꺼진 직후라 기업들의 채용이 얼어붙어 있었고, 게다가 한국 경제 위기로 인해 한국인 디자이너를 필요로 하는 프로젝트도 거의 없던 시기였습니다. 수십 군데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도 보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애틀란타에서의 마지막 면접입니다. 먼 거리를 운전하고 모텔에서 묵어가며 참석했지만 결과는 불합격. 하지만 그때 면접관께서 해주신 말씀이 제게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성과보다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듣고 제 접근 방식을 완전히 바꾸게 된 거죠. 국내에서의 모든 경력과 이력을 내려놓고 완전한 신입의 자세로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 경험이 오히려 미국 사회와 기업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 이후, 구직 활동에서 어떤 전략적 변화를 시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애틀란타에서의 면접 후 긴 귀로는 상당히 막막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날 때 가졌던 미국 정착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이외의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중한 검토 끝에 10개의 목표 기업을 선정하고, 직접 전화 연락을 시도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무모한 시도였죠. 아무런 사전 접촉 없이 갑작스럽게 "귀사의 대표를 만나 뵙고 싶습니다"라는 요청을 했으니, 대부분의 기업들이 난색을 표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도 한 회사에서 대표가 직접 전화를 받게 되었고, 저는 한 발 더 나아가 "2시간 내에 귀사를 방문하여 뵐 수 있을까요?"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드렸습니다. 놀랍게도 승낙을 받았고, 서둘러 포트폴리오를 들고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면접 자리에서 저는 더욱 과감한 제안을 드렸습니다. "2주간의 실무 테스트 기간을 주십시오. 만약 제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시면 언제든 계약을 종료하셔도 좋습니다." 이후 2주간 전력을 다해 업무에 임했고, 다행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제가 얼마나 실력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한국에서의 6년 경력이 있었지만, 그건 미국에서 전혀 의미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저의 무모해 보였던 제안이 오히려 미국에서는 적극성으로 비쳤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저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신 Joe Wisnewski 대표님 덕분에 HGA에서 미국 커리어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죠.
돌이켜보면, 그 절박했던 상황이 오히려 통상적인 채용 절차를 뛰어넘는 도전적인 시도를 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새로운 기회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9/11 테러 이후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2001년 9월 11일, 알렉산드리아 사무실에서 평소처럼 일하던 가을 아침이었습니다. 갑자기 근처에서 쿵하는 폭발음이 들렸고, 곧이어 펜타곤 피격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빌딩이 무너지고 비행기가 추락하는 영화 같은 광경에 모든 사람이 패닉 상태에 빠졌죠.
어쩌면 이 사건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정부는 정보 시설의 전면적인 현대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저희 회사가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되었거든요.
처음에는 단순한 '역사 보존 프로젝트'로 알고 있었으나,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의뢰인들의 특별한 행동 양식과 보안 수칙들을 통해 이 프로젝트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한 달이라는 매우 긴박한 일정 역시 이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암시하고 있었죠.
한국에서의 업무 경험을 살려, 철저한 시간 관리와 야근도 마다하지 않으며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실시간 상황 파악이 가능한 대형 비디오 월을 중심으로 반원형 워크스테이션을 배치하고, 각 스테이션에 다중 터치스크린 모니터를 설치하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통제 시스템을 구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공간이 FBI 건물 내 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Central Command Center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 미팅마다 권총을 소지하고 창가를 피해 앉았던 의뢰인들의 행동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죠. 이곳은 CIA, FBI, NSA, 백악관이 테러 대응을 위해 정보를 공유하고 통합 작전을 수립하는 핵심 시설이었으며, 9/11 이후 부시 대통령의 지시로 긴급히 추진된 국가 안보 프로젝트였던 것입니다. 모든 의뢰인들의 행동이 최고 수준의 보안 프로토콜에 따른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 이후 어떠한 변화가 있었나요?
FBI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약 2년간 유사 프로젝트들을 연이어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Leo A Daly라는 회사에서 제안이 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Leo A Daly에서 정말 저를 원한다고요?"라며 믿기지 않았죠.
동료들 말로는 FBI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완수가 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였다고 합니다. 특히 Leo A Daly는 정부 프로젝트 중에서도 최상위급 프로젝트만을 담당하는 회사였기에, 이는 정말 고무적인 제안이었죠.

Leo A Daly에 합류하자마자 대형 프로젝트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백악관을 비롯해 FBI, CIA 등 미국의 최고 보안시설들을 설계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CIA 본부 프로젝트였습니다. 버지니아주 랭리에 위치한 이 건물은 겉으로는 평범한 보험회사로 위장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이 건물을 테러 대비 시설로 전면 개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정말 이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나?'하는 감격스러운 순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Leo A Daly에서의 근무 경험은 어땠나요?
Leo A Daly에서의 2년은 제 경력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백악관의 대통령 숙소와 게스트하우스 디자인, FBI 트레이닝 센터 프로젝트 등 대규모 정부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 미국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알게 되었으며, 반드시 정확해야 하는 업무들을 진행했습니다.
어느새 저는 회사에서 정부 프로젝트 전문가이자 빠르고 정확한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미국 동료들은 "왜 그렇게 서두르느냐"며 의아해 했지만, 이는 오히려 제게 강력한 경쟁력이 되었습니다. 특히 9/11 이후에는 국가 안보와 직결된 프로젝트들의 신속한 진행이 더욱 중요해졌는데,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서 터득한 업무 처리 능력이 미국 정부의 긴급한 보안 강화 요구와 딱 맞아떨어진 겁니다.
약 4-5년간의 미국 정부 프로젝트 수행을 통해, 저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가장 깊숙한 곳을 경험하며 이 나라의 강인함과 시스템의 저력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정부와 민간 영역을 아우르는 폭넓은 시각을 갖게 해주었고, 제 커리어에서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되었죠.
결과적으로 이러한 경험들은 제가 미국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2000년 미국 시민권 취득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RTKL에서의 변화가 인상적입니다. 정부 프로젝트에서 리테일로의 전환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2005년 11월, 워싱턴 D.C.에서의 생활이 점차 부담스러워지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이 넘는 출퇴근 시간, 정부 프로젝트의 반복되는 단조로움 속에서, 문득 한국에서 백화점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경험했던 활기찬 에너지가 그리워지기 시작했죠.
그러던 중 우연히 참석한 모임에서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미국 최고의 리테일 설계회사 RTKL의 디자인 디렉터를 만나게 된 거죠. 평소에도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회사였기에, 얼마 뒤 인터뷰를 보고 이직을 결정했습니다. 돌고 돌아 결국 제가 원하던 회사에 가게 된 셈이죠.
RTKL은 미국 최초의 쇼핑몰을 설계한 회사라는 점에서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회사가 있는 볼티모어라는 도시도 좋았죠. 워싱턴 D.C.보다 주거비용이 훨씬 저렴했고, 무엇보다 제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리테일 분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요.

그런데 예상과 달리 병원 프로젝트를 맡게 되셨다고요?
운명이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RTKL 입사 직후, 볼티모어 본사에서 근무하던 중 달라스 오피스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이슨, 서울성모병원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가 우리의 디자인에 만족하지 못해 한국인 디자이너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RTKL은 전 세계에 약 20여 개의 오피스를 두고 있었는데, 텍사스 달라스는 그중에서도 의료 시설 부문의 핵심 사무소였습니다. 회사는 여러 지사를 수소문한 끝에 한국인인 저를 찾아낸 것이죠.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미국으로 유학 오는 한국인의 수가 크게 줄었고, 미국과 한국 양국의 시스템을 모두 이해하는 전문가가 매우 드물었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제게 특별한 기회로 다가온 것이죠.
서울성모병원 프로젝트가 성공한 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이 프로젝트는 한국의 의료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미국의 선진 의료 설계 기술을 성공적으로 접목시켜,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2년간의 프로젝트 수행 후, 회사로부터 놀라운 제안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이슨, 우리 회사 헬스케어 사업부의 디자인 디렉터를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당시 제 나이 37세에 받은 이 승진 제안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한국 기준으로는 과장급 직원이 이사급으로 도약하는 파격적인 발탁이었죠. 많은 이들이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이 제 앞에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저의 커리어는 더욱 가파르게 성장했습니다. 세계 10대 병원 중 절반의 디자인을 책임졌고, 캐나다와 남미, 중동, 중국, 베트남 등에서 병원과 호텔 프로젝트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미국 회사를 대표하는 동양인 디자이너라는 독특한 포지션은 아시아 시장에서 강점으로 작용했고, 이를 통해 더욱 다채로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20년 동안 미국에서 계시다가 한국으로 돌아오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2019년은 제 커리어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제가 수주한 프로젝트 규모는 최고치를 기록했고, 한국 지사 설립도 준비 중이었죠. 안정적인 직장과 성공적인 커리어를 뒤로하고 새로운 도전을 결심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제가 쌓아온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열망이 그 어떤 불확실성보다 컸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획이었습니다. 50세에 맞춰 그동안의 경험과 전문성을 토대로 창업하겠다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려왔죠. 미국 최고의 건축사무소에서 20년간 쌓은 경험, 세계적인 프로젝트들을 이끌며 얻은 노하우, 그리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익힌 미래 공간 산업의 흐름이 새로운 도전을 위한 든든한 자산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코로나19로 인한 업무 중단이 오히려 전환점이 됐어요. 팬데믹으로 전 세계의 공간 개념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며, 이 위기가 혁신의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미국에서 쌓은 20년의 경험을 한국의 공간 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때가 왔다고 확신했죠. 그렇게 2020년 2월, 코로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과감히 회사를 그만두고 JLP 인터내셔널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JLP는 기존 디자인 회사들과는 다른 접근법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차별점이 있나요?
전통적인 디자인과 설계 분야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각 전문 영역이 서로 단절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시행사는 수익성에만 집중하고, 설계사는 구조와 법규에만 매달리며, 해외 설계사는 한정적인 디자인의 심미적 완성도만을 추구합니다. 운영사 역시 관리 효율성만을 고려할 뿐이죠. 이처럼 분절된 접근으로는 공간이 가진 진정한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하기 어렵습니다.
JLP는 이러한 단절된 영역들을 하나의 통합된 서비스로 재구성했습니다. 우리는 "이 공간의 지속가능한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모든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가치란 무형, 유형의 가치 모두를 말하죠. 수익과 기업의 비전을 동시에 만족시킬수 있는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저희는 공간을 단순한 건물이 아닌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바라봅니다. 현재 수천억, 수조 원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들이 많지만, 사업의 비전을 구현하고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수익까지 창출하는 융복합적 접근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에요. 대부분 수익 극대화와 시간 단축만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지만, 오히려 초기 단계에서 비전과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는 과정을 거칠 때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차별화된 접근으로 현재 어떤 성과를 내고 계시나요?
현재 크래프톤, 한화생명, 원익앨앤디, 대우건설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과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각 프로젝트가 지닌 고유한 특성과 다양성인데요.
대표적인 사례로 원익앨앤디의 충주 리조트 프로젝트를 들 수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단순한 휴양 시설을 넘어, 지역의 문화와 자연을 새롭게 해석한 목적형 공간을 구현하고자 했죠. 80여 개의 전통 양조장, 월악산의 약초, 맑은 물과 같은 지역의 고유한 자산들을 글로벌 데스티네이션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건축물의 설계에 앞서 JLP Lab의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거시적 트렌드와 사용자 프로파일링을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최적의 공간 구성을 도출합니다. 각 기업의 비전과 목표를 공간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이 공간이 어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프로젝트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어요.
앞으로 JLP가 그리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JLP가 10년, 20년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공간의 비전을 구현하는 새로운 개념과 서비스를 최초로 정립했고 시장의 혁신을 선도했다고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저희의 궁극적인 목표는 클라이언트의 성공이며,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의미 있는 공간을 경험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작은 시작이었지만, JLP는 단순한 기업 이상의 사명감과 철학을 품은 회사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희 직원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우리 팀원들은 모두 유형의 가치를 넘어 더 큰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런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함께라면 JLP가 더욱 성장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결국 모든 것을 이루는 건 사람이니까요. 제가 시작은 했지만, 오래도록 지속되는 의미 있는 기업으로 남는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 오늘의 큐터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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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큐터뷰 #19. 브랜드는 결국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VOTTA 대표 김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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