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줄 알았던 인스타 감성 브랜드들의 고향

이은영

by. 이은영

25. 04. 14



동대문은 오랜 시간 한국 패션의 출발지이자 중심지였습니다. 2000년 초반 친구들, 동생과 자주 다녔던 밀리오레, 두타를 생각해 보면 한국의 패션이 얼마나 아시아 트렌드를 선도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죠. 항상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였고, 사람에 휩쓸려 가면서 쇼핑을 했던 기억, 그리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쇼핑을 하다 집에 오면 발이 퉁퉁 붓는데도 '싸게 잘 샀다'라는 생각에 흐뭇했던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사진: Unsplash


사업자 입장에서 2000년대 초반 동대문은 사입과 택갈이를 통해 온라인 쇼핑몰 창업붐의 현장이었고, 스타일난다와 같은 기업들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한 곳이었어요. 하지만 10여 년 넘게 쇠퇴와 정체를 반복하고, 상당수 점포들이 문을 닫고 휘청이면서 예전의 아성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빌딩에 들어가면 빼곡히 점포들이 들어서고 항상 시끌벅적했다가 절반 이상의 점포가 빠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죠.


그런데 최근 동대문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옷을 떼어다 파는 곳'이라는 동대문 이미지가 K-패션 인큐베이터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인데요. 스몰 브랜드가 탄생하고 성장하며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내일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사진: Unspalsh


이러한 변화는 통계로도 살펴볼 수 있는데요. 2023년 기준 국내 의류, 신발 상표 등록 수는 1만 1,067건으로 2014년(4,167건) 대비 약 2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반면에 같은 기간 국내 의류 제조업체 수는 약 10% 감소했어요. 생산 공장의 상당수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동시에 브랜드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한국은 브랜드가 콘텐츠가 되고, 콘텐츠가 자산이 되는 시대에 들어섰어요. 그리고 동대문에서는 아이디어, 스토리,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디자이너가 스몰 브랜드를 만들면서 새로운 엔진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스몰 브랜드의 등장은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아요. 전 세계적으로도 소규모 브랜드 창업은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미국 특허청의 자료를 보면 2023년 기준 의류 브랜드 창업 관련 신규 등록 상표가 약 6만 3천 건에 이르며, 전년 대비 9.4% 증가한 수치예요. 그리고 글로벌 전자상거래 플랫폼 쇼피파이의 보고서에 따르면 신규 등록된 패션 브랜드 중 70% 이상이 5인 이하 규모의 창업팀이며, 초기부터 SNS 기반의 콘텐츠 마케팅을 진행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스몰 브랜드, 팬덤으로 성장하다

과거의 성공 공식을 버린 스몰 브랜드들이 동대문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요. 이들은 대량 생산보다는 고유한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세계관을 기반으로 빠르게 기획하고, 팬덤과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K-디자이너 브랜드의 대표 주자로 성장한 마뗑킴이 좋은 사례인데요. 명확한 디자인 아이덴티티, 여성 중심의 타깃, 팬덤과 리미티드 전략으로 완판 브랜드가 됐습니다. 젊은 직장 여성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마뗑킴이 어디에 특가가 떴다, 창고 개방한다' 이야기가 들리기도 하죠. 바로 주변만 보더라도 마뗑킴이 제법 인기라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사진: 마뗑킴


오디너리피플은 정형철 디자이너의 브랜드인데요. 뉴욕 패션위크 진출 이후 한국 내에서도 인지도를 빠르게 높이고 있습니다. 동대문 기반의 샘플링과 커스터마이징의 강점을 활용해 빠른 회전율을 확보하면서 성장하고 있어요.


이벳필드는 빈티지 야구 유니폼 무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동대문의 원단을 기반으로 기획, 생산, 판매까지 원스톱 솔루션으로 실행해 성장하고 있습니다. 모호는 건축에서 영감을 받은 구조적 디자인이 특징이며, 시즌 컬렉션 없이 '작은 시리즈' 단위로 제품을 공개하면서 마니아층의 인기를 얻고 있어요. 모호 역시 동대문 기반의 인프라와 SNS를 활용해 팬덤을 만들어 나가고 있죠.


가든익스프레스 24SS 컬렉션 (사진: 가든익스프레스)


그 외 2000아카이브스, 가든익스프레스도 동대문 기반의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2000아카이브스는 독특한 실루엣과 빈티지 무드로 뉴진스, 에스파, 르세라핌 등이 착용하면서 한국,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고요. 가든익스프레스는 무신사, W컨셉에 입점해 있으면서 자연에서 영감받는 컬러감, 소재 활용이 인상적입니다.


이러한 브랜드들의 공통점은 명확합니다. 단순한 제품이 아닌 브랜드 자체가 하나의 미디어, 하나의 콘텐츠 플랫폼으로 작동하는 거죠.


이들을 연결하는 구심점에는 '무신사 스튜디오'가 있습니다. 사실 무신사는 국내에서 온라인 패션플랫폼 1위라는 타이틀 외에도 동대문 인프라를 통해 신진 디자이너를 인큐베이팅하는 것으로도 알려졌어요.


스몰 브랜드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건 단순히 디자인 감각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동대문에는 샘플 제작, 원단 구매, 피팅 모델 섭외, 사진 및 영상 촬영, 커머스 연계 플랫폼까지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모든 인프라가 모여 있는데요.


무신사 스튜디오 동대문종합시장점 (사진: 무신사 스튜디오)


무신사 스튜디오는 동대문의 인프라를 활용하기 위해 2018년 공유 오피스를 열었고요. 패션 스타트업의 엑셀러레이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동대문종합시장 4층에 2호점을 오픈하면서 동대문 내의 창작자 생태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죠.


이 공간에는 디자이너, 모델, 포토그래퍼, 유튜버가 한데 모입니다. 현장에서 원단을 고르고, 자리에서 바로 콘텐츠를 촬영하며 무신사 플랫폼에 등록하는 거죠.


그리고 무신사는 이러한 신진 디자이너들의 엑셀러레이팅을 통해 새로운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제품을 입점시키면서 함께 성장하고 있습니다. 2023년 기준 무신사의 연간 거래액은 약 1조 8천억 원이며, 입점 브랜드 수는 8천 개 이상입니다. 그리고 이중 약 60%는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예요.


신진 디자이너의 상당수가 무신사 스튜디오 또는 동대문 기반 창업팀이라는 점은 무신사가 브랜드 탄생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죠.


마뗑킴 일본 시부야점을 오픈하는 미야시타 파크 건물 전경 (사진: 무신사 뉴스룸)


이러한 속도와 밀도는 중국의 C커머스가 절대 모방할 수 없는 독창성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 무신사 스튜디오 출신 브랜드 중 다수가 글로벌 진출을 시도하고 있고요. 미국, 일본, 동남아 소비자 사이에서 감성 있는 K-패션 브랜드 인식되고 있습니다.



마케터의 시선

'옷을 떼다 판다'라는 동대문의 오래된 서사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즘의 패션 소비자는 매장보다 스토리텔링을, 유통보다는 팬 커뮤니티를, 광고보다는 숏폼 콘텐츠를 중심으로 브랜드를 소비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마케팅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브랜드를 움직이는 엔진 자체가 달라졌음을 의미하죠. 


그래서 동대문은 이제 쇼핑을 하기 위한 공간에서 브랜드와 팬덤이 태어나는 창작 플랫폼으로서의 의미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동대문은 어릴 적, 제 20대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곳이에요. 몇 천 원짜리 칼국수를 먹으면서 허기를 달래고, 6~7시간 넘게 걸어 다니면서 쇼핑을 하고. 5만 원 내외의 예산으로 옷을 사면 비닐 봉투를 잔뜩 들고 올 수 있었던 낭만 있는 공간입니다.


동대문이 다시 한번 패션 트렌드의 중심으로 떠오르길 바라봅니다.


* 이 글의 원고는 아샤그룹 이은영 대표님이 제공해 주셨으며, 큐레터가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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